走馬燈
written by. 하루
@MyLittleNa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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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바라! 하이바라!! 하이바, 라⋯!"
우부스나가미 신앙은 고작 2급 따위가 아니었다. 토지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바라는 그것을 제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기분이 좋으니까!'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글쎄. 대충 해서 해결되면 그냥 대충 해도 되지 않을까.'
모든 일에 최고의 노력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무엇 하나 손 쓸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이미 한쪽 다리가 날아간 하이바라는 정신을 잃었고, 비릿한 피냄새와 원한이 어지러이 뒤섞여 맴도는 이 저주의 장소에서 어떻게든 하이바라를 데리고 벗어나려 애썼다.
"정신 차려!!"
물론 절대로 들리지 않을 말이었다. 알고 있지만,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맞지만, 하이바라의 말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채 곧 실혈사 할 위기에 처한 건장한 남성을 데리고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쿠웅-
빌어먹을 주령의 공격이 한차례 더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하이바라의 남은 다리가 잘려나갔다. 젠장, 젠장, 젠장.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저 주령을 완전히 퇴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하이바라의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온 후부터 어떤 것도 명확하게 기억나질 않았다. 마치 새하얀 안개가 온통 머리를 뒤덮은 것처럼, 무슨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저 살아서 나가기 위해, 하이바라의 시신이라도 챙겨서 나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한 일격을 날린 것 말고는. 어떻게 그곳을 나와서 고전에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다시금 기억을 찬찬히 헤어보아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안개에 둘러쌓여 온통 흐릿한 곳에서는 그 주변을 둘러보아도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주술사는 거지 같다. 주술사란 남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때에 따라 동료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강요하지 않았을 때에도 자신의 목숨을 동료를 위해 희생하는 주술사는 늘 존재했다. 나한텐 하이바라가 그랬다.
'나나미, 피해!'
주령의 공격이 닿지 않을 곳으로 나를 밀친 하이바라는 혼자서 주령과 대치했다.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대체 누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싶어할까. 심지어 하이바라는 나를 살리겠다고 죽었다. 하이바라를 보내준 뒤, 빈 교실에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 날이 늘었다. 고전 어디를 둘러봐도 하이바라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나나미, 이거 봐! 동생이 보내준 건데 요즘 비술사들은 이러고 논대. 귀엽지? 우리도 다음에 휴가 받으면 이런 거 한번 해볼까?'
'그런가. 그냥 그래보이는데. 뭐, 직접 해본 사람들이 재밌다고 느끼면 된 거지.‘
 
하이바라와의 마지막 임무를 나가기 직전에 나눈 대화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빨리 끝내고 쉬고 싶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 건성으로 대답을 했었는데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과거를 곱씹는 건 정말 쓸모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 쓸모없는 짓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 일을 되돌아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순간을 보람차게 살아가고자 하던 하이바라와 다르게 나는 무엇에서 보람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주술계에 남아있어야 할 아주 작은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아니,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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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고전을 떠난 지 4년. 이 지긋지긋한 샐러리맨 생활을 계속 하다보니 나는 원래도 삶의 보람 따위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주술고전에 갔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가야 해서 갔던 것 같다. 주술사의 수가 적다니까.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곳에 입학했었는지, 그때 무슨 각오를 했었는지. 아니, 각오를 하긴 했던가. 전부 허상으로 느껴질 만큼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 모든 것을 묻어두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거창한 각오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저 눈 뜨면 일하고, 배고프면 식사를 하고, 그렇게 버티는 삶을 살았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과 인연을 끊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라 믿어서 자나 깨나 돈 생각만 했다. 그 언젠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때만 기다리면서 기계처럼 살았다. 그러다가도 가끔씩 고전에서의 나날들이 생각나면 자연스레 하이바라가 생각났고, 그럴 때면 회의감이 강하게 들었다. 대충 해서 되는 일은 대충 하고, 노력해도 안되는 일은 애초에 시작부터 말아야 하는데. 그럼 너도 살아있었겠지. 이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난 계속 네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날의 흐릿한 악몽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돈이 필요하다. 난 결국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연히 간 베이커리에서 본 제빵사의 어깨에 올라탄 저급 주령. 괜히 나섰다가 괴상한 영매사로 오해받아서 귀찮아질 바에야 내 갈 길을 가는 게 낫다. 하지만 그날따라 가게를 나오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약간 무거웠다.

'자네가 퍼스트로 생각해야 할 건 회사의 이익이야.'
'발전 가능성 없는 쓰레기 주식을 말발로 팔아서라도요?'
'오브 코스!‘
 
나는 일의 보람이나 사는 보람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지급받으면 될 뿐. 이 지긋지긋한 저주도 타인도, 돈만 있으면 인연을 끊고 살 수 있다. 이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지만,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사장의 철학을 들을 때마다 늘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 즈음엔 유독 일이 많았다. 그러니까 내 인생이 다시 큰 전환점을 맞이하기 직전, 그땐 이틀에 한번 꼴로 회사에서 밤을 샜고, 철야 후에는 쪽잠을 자고 일어난 뒤 잠깐 빵을 사러 나갔다 오는 게 외출의 전부였다.
"괜찮으세요? 잠은 제대로 주무세요?"
"당신이야말로 피로가 쌓인 것 같은데요."
"아, 눈치채셨어요? 요즘 왠지 어깨가 무겁다고 할까, 잠도 깊이 못 자요."
"제가 하는 일은 부자한테서 돈을 맡아서 그 사람을 더욱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겁니다. 대략 그런 일이죠. 솔직히 제가 없어도 곤란한 사람은 없어요."
그래. 평범한 금융회사의 샐러리맨 하나가 사라져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누군가 죽지도 않는다.
"하지만 빵집이 없으면 빵을 먹고 싶은 사람은 곤란해질 겁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간의 사이클을 벗어난 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돈을 더 잘 번단 말이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자, 자랑인가요...?"
"아뇨."
그래, 정말 이상한 얘기다. 이건 자랑일 수가 없다.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죄송해요, 저한텐 좀 어려운 얘기네요."
"한 걸음만 앞으로 나와 주시겠어요?"
아직도 제빵사의 어깨 위에 태연히 올라탄 상태로 이쪽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승두 한 마리. 이 정도의 사소한 일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귀찮은 일이 아주 낮은 확률로 생긴다 해도 원래대로라면 또다시 모른 척 했을 텐데, 끊이지 않는 철야로 인해 잠시 사고회로가 굳은 것인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됐다.
"어깨는 좀 어떻습니까?"
"어라? 가벼워졌네?"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면 병원에 가보세요. 그럼 전 이만."
"저기, 잠깐만요. 저기요! 고마워요! 또 와 주세요!"
고마워요⋯. 사는 보람 같은 것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진작 알고도 외면하고 있던 것이었다. 주술사 한 명은 작게는 수십명, 나아가 수천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갑자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나를 옥죄고 있던 죄책감이라는 갑갑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나나미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내일이라도 주술고전으로 가서⋯ 왜 웃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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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그래⋯, 말레이시아⋯. ⋯ 쿠안탄이 좋겠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다 집을 짓자. 사놓기만 하고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한 페이지씩, 이제껏 흘려보낸 시간을 되찾듯이 책장을 넘기는 거야.

아니다. 나는 지금 후시구로 군을 구하러⋯. 마키 양⋯. 나오비토 씨는? 두 사람은 어떻게 됐지⋯? ⋯지쳤다, 지쳤어. 그래, 지쳤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주술사라는 마라톤에는 끝이 존재하지 않는 걸 알고도 돌아왔다. 이미 한 번 도망쳤던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 것만큼 감사한 일은 없다는 생각과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버텼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하이바라, 나는 결국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도망치고, 또 도망친 주제에 보람 같은 애매한 이유로 돌아와서는. 세상에 악인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선인이 많은 것도 아니다. 악인도, 선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구한다고 바뀐 게 있을까. 의미가 있을까. 귀가 울린다. 신경은 다 죽었을 텐데도 아까의 작열통이 남아서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고통스럽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가 뒤엉켜서 시야가 붉게 얼룩지는 바람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기 서있는 후배 주술사를 가리키는 하이바라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보인다. 온통 어렴풋한 시야 속에 단 하나의 초점이 잡히니까 이리저리 얽히고설켜있던 생각들도 명쾌하게 정리된다. 그렇지만 안 돼, 하이바라. 그건 아냐. 말해서는 안 돼. 그건 그에게 '저주'가 될 거야. 그렇지만,
 
"이타도리 군. 뒷일은 부탁합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마지막 말. 그래. 나는 여기서 죽지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구해왔고, 이타도리 군에게 뒷일을 맡기고 간다면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구한 게 선인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나는 수많은 생명을 구해왔다.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이타도리 군이라면 충분히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귀가 울린다. 많은 사람들의 감사 인사가 귀를 메운다.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에도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그때도 주술사로 태어나고 싶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보람을 느낀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이제라도 의미를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좀, 아니 많이 늦었지만, 고마워. 하이바라. 내가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줘서. 그리고 내 혼란들을 정리해줘서. 이타도리 군, 뒷일은 부탁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fin